“내가 나답게 잘 살고 싶어서요.” 조혜민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에게 ‘꿈’을 물었더니 “내가 행복하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조 활동가는 20대 초반부터 시민단체, 정당을 거치며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공익 분야에 몸담아온 인물이다. 조 활동가는 “인권 운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무조건 ‘이타적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쉽다”며 “그러나 자신이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게 먼저”라고 말했다. 그는 “남을 위한다고만 생각하면 쉽게 지치기 때문”이라며 “결국 다른 사람들의 인권을 지키는 일과 내 인권을 지키는 일이 이어져 있다는 인식이 있어야 인권활동도 오래 지속할 수 있다”고 했다. 그가 바라는 세상은 모두가 기본적 인권을 존중받으며 살 수 있는 곳이다. 성별이나 성적 지향, 사회경제적 지위를 이유로 착취당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이유로 차별받지는 않는 세상이 돼야 나 역시 나답게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살고 싶은 세상’이 아직 요원하다는 충격을 또다시 주는 일이 나타났다. 바로 최근 세상을 뒤흔든 ‘딥페이크 성범죄’ 사태다.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해 연예인 등 유명인은 물론 지인까지 합성해 음란 동영상을 만들어 퍼뜨리는 등 범죄가 만연하단 보도가 이어지며 세상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는 “최근 딥페이크 사태를 보고 ‘또 바통 터치가 됐구나’ 싶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 ‘바통 터치’요? “‘미투 운동을 불러일으킨 성범죄, n번방 사건, 스토킹 살인사건, 교제폭력에 이어 이번에는 딥페이크 성범죄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가지 이슈가 터져서 대응하고 나면 다른 범죄가 나타나고… 마치 바통 터치를 하는 것만 같잖아요.” – 성범죄가 형태를 바꿔가며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뜻이군요. “그렇죠. 여성을 대상으로 한 젠더폭력은 이전부터 있어왔어요. 최근 몇 년사이 굵직한 사건들이 줄을 이어 보도되며 ‘미투 운동’이 이어지고, 교제 폭력이나 스토킹 문제… 다른 사건 같아 보여도 실은 젠더폭력이 이어지는 모습으로, 바통 터치 되며 주자만 달라지고 있을 뿐이죠. 그러니 딥페이크 사태에 대해서도 사회적 관심이 해당 사안에만 매몰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젠더폭력을 해결해야 한다는 강력한 문제의식이 필요하죠. 딥페이크 사태를 통해 드러난 우리 사회에 아직 만연한 젠더 폭력을 돌아봐야 합니다.” – 딥페이크 기술 자체를 규제해야 한다고 보시나요. “그렇다기보다, ‘기술은 진공 상태에 있지 않다’라는 전제에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 기술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말씀이시군요. “맞습니다. 기술이 사회 속의 여러 위계질서나 현실과 맞물리며 기술이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지가 보이는 것이죠. 예컨대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을 살아 있는 듯한 영상으로 만드는 데에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한다면 그것은 선이지요. 친구 사진을 합성하여 성착취물로 만드는 데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한다면 그것은 분명한 악입니다.” –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기술의 쓰임이 달라지는 거네요. “그렇죠. 딥페이크 기술을 둘러싸고 있는 개인, 기업, 정부가 이 기술을 어떻게 활용하고 상업화하는지가 관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태의 해결 방안으로 ‘SNS를 하지 마라.’, ‘텔레그램을 탈퇴하라.’ 등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할 수 없어요. 시장의 상업화가 더 빠를 테니까요. 텔레그램이 없어진다고 해도 다른 시장이 또 만들어질 것입니다. 다만,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정확히 빨간 불을 내리고, 문제의 기업에 대해서는 사회적 책임을 부여하는 등 권력의 몫을 해내야 하죠.” – 구체적으로 어떤 걸 해야 할까요? “기술 발전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고민하고 가해자 처벌 강화와 관련한 정책을 마련하는 것도 분명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피해자 보호와 지원 차원의 고민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딥페이크 방지법이 빠르게 처리된 것은 다행이지만 숨은 피해자 발굴에 대해 후속적으로 논의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전에 제가 젠더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일을 한 적이 있는데, 사람들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신고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피해자 중에는 신고의 문턱을 넘지 못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죠. 각종 언론에서 딥페이크 피해자에 대한 통계를 제시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통계선상에 잡히지 않는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그런데 통계만을 바탕으로 딥페이크 방지법이 만들어지면 신고를 하지 못한 피해자의 이야기는 법에 담기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 딥페이크 성범죄…피해자 지원에 초점 둬야 n번방 사건이 불거졌던 2020년에도 조 활동가는 디지털 성범죄법에 피해자의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2020년 4월 20일에 열린 정의당 상무위원회의에서 당시 정의당 여성본부장이었던 조 활동가는 피해자에게 2차 가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디지털 성범죄에 관한 구체적 양형 기준을 마련해야 함을 촉구했다. 이와 동시에 “용기 낸 피해자 곁에서 끝까지 함께하겠다.”며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을 위한 의지를 밝혔다. – 정당인으로 계속 계셨다면 이번에도 피해자 지원에만 초점을 맞춰 정책을 제안하셨을 것 같나요? “글쎄요. 그건 아닐 것 같습니다. 지금껏 강조해왔듯이 ‘피해자 지원’도 물론 중요하지만, 처벌에 대한 부분을 빼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거예요. 피해자의 피해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처벌 수위를 어떻게 할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니까요. 그래서 처벌에 관해서도 의견을 많이 냈을 것 같고요. 피해자 지원 측면도 같이 이야기하려고 노력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최근 딥페이크 소지 처벌법의 조항에 ‘알면서’라는 단어를 달려고 한 정치권에 대해 거세게 비판하지 않았을까요?” 지난 9월, 2020년에 도입된 딥페이크 처벌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알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기존 법안에 ‘허위 영상물을 소지·구입·저장 또는 시청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라는 문구를 추가하는 것에 대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딥페이크 성착취물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영상을 시청했다가 처벌받을 수 있다고 우려하며 ‘알면서’라는 문구를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가해자가 부당하게 처벌을 피할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되면서 해당 문구는 삭제됐다. 딥페이크 처벌법은 과실범이 아닌 고의범을 처벌하는 법이므로 ‘알면서’라는 단서 조항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 ‘알면서’ 추가를 주장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뭐라고 한마디 했을 것 같나요? “‘알면서 얘기하신 게 아니길 바랍니다.’라고 했을 것 같아요. ‘알면서’라는 표현 하나가 현실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라고 했을 때 이 표현으로 인해 가해자를 대리하는 변호사는 가해자가 유리하게끔 사건을 재편할 수도 있잖아요. 따라서 이 부분은 정치권이 처벌의 사각지대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처벌의 사각지대’라고 하니 가해자의 절반 이상이 미성년자였다는 사실도 떠오르는데요. 딥페이크 범죄가 교실 안에서까지 일어났다는 사실에 사람들이 더 충격을 받는 것 같아요. “과연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이 사태는 요즘 10대들이 특이해서 나타난 결과물이 아니라 지금까지 젠더폭력에 대해 사회가 방관하고 내버려 둔 것에 대한 결과라고 생각해요. 또 ‘이 정도까진 해도 되잖아.’라고 여기던 수위의 범위가 달라지고 그것이 상업화가 되는 것이 문제인 거죠. 결국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경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문제로 바라볼 수 있는데, 여기서 정치권의 역할이 중요한 겁니다. 근데, 잘 못하고 있어요.” – 뭘 못하고 있나요. “딥페이크 방지법이 10대를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거 같아요. 딥페이크 방지법에는 10대 가해자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가 아니라 학교 현장에서, 그리고 10대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딥페이크 성범죄를 어떻게 방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지 않죠. 사회 곳곳에 만연한 젠더 차별 의식을 뿌리 뽑고 올바른 젠더 감수성을 기르기 위한 적극적인 움직임이 필요한 때입니다.” –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젠더 감수성과 관련하여 각자의 속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해요. 저희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편인데요.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딸을 둬서인지 여성주의에 대해 미약하나마 노력하고 계세요.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저만큼 여성주의를 인정하고 가부장성을 완벽히 버려야만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삶의 방식에 대해 아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정답이라 믿는 세상에서 살았어요. 그렇기에 젠더 감수성 정립에 있어 개인의 한계가 있죠. 저는 안 그럴까요? 저는 시각장애인 지인이 없어요. 그들의 삶을 모르다보니, 시각장애인 입장에서 보기에 저의 행동이나 말이 차별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의도가 없더라도요. 그게 바로 제가 살아가는 속도인 거예요. – 속도가 다르니 일부 면죄부를 줘야 한다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각자의 속도가 다르다고 해서 면죄부를 줘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사회를 이루는 개인이 가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자는 것뿐이죠. 그러나 이 이해가 허용되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정치권이에요. 정치권은 어떤 방식으로든 국민들에게 나아가야 할 방향이나 신호를 제시해주어야 합니다. 즉, 개인의 속도는 다를지라도 정치권의 속도는 느리면 안 돼요. 제가 정당인이었던 시절에도 젊은 정당인으로서 정치권의 바퀴를 좀 더 빨리 굴리기 위해 노력했죠. – 딥페이크 사태를 대응하는 정치권의 속도는 어때 보이나요. “정치권에서는 딥페이크 문제를 이전부터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n번방 사건이 보도되었을 때에도 모든 정당들이 선거 공약으로 ‘n번방 방지 공약’을 내걸었고요. 2023년 12월 20일에는 선거일 90일 전부터 딥페이크를 활용한 선거운동을 금지하는 내용의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정치권이 딥페이크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딥페이크가 선거 운동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막은 것이죠. 그런데 안타까운 건 이러한 문제 의식이 공직선거법 개정에만 머물렀다는 거예요. 즉, 정치권에서도 딥페이크의 문제를 다른 현안들과 바통 터치하며 미뤄두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 딥페이크 재발 방지를 위해서 권력의 역할이 중요하겠네요. “그렇죠. 사회가 바뀌지 않고 제도적으로 변화하는 게 없다면 바통 터치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태가 부디 젠더폭력의 마지막 주자이길 바랍니다. 그동안 여성단체 활동가로서, 정당인으로서 인터뷰도 많이 하고 다양한 작업들을 했는데요.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까마득합니다. 제도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더 이상 이 사태가 단일한 사항으로서 바통 터치되지 않고, 문제를 꿰뚫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가 정확히 지적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여성들이 아무 걱정 없이 나답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결국에는 어떤 사람도 피해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꾸시는 거네요? “맞아요. 그런 세상에는 여성주의도 ‘주류’가 되어 있겠죠? 그땐 제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여성주의가 아닌 다른 연구 대상을 찾았으면 좋겠네요. 젠더폭력 피해자들이, 혹은 피해자가 될까 두려워하는 모두가 안전한 법망 아래 나로서,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오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