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팁스칼럼] 스승의 자리를 규칙이 대신할 순 없다
얼마 전 일이다. 지인이 자신의 자녀가 ‘교권 침해 가해자’가 됐다며 한숨을 쉬었다. 사연은 이랬다. 반 학생 대부분이 모인 단톡방에서 누군가 담임 교사가 한 우스꽝스러운 캐릭터와 닮았다며 캐릭터 몸에 담임교사 사진을 합성해 올렸는데, 선생님이 이를 알고 단톡방에 있던 학생 전체를 교권 침해 위원회에 회부한 것이다. (성적이거나 폭력적인 내용은 전혀 없었다. 가령 '슈렉 담임' 이라며 슈렉 몸에 담임교사 얼굴을 합성하는 식이었다.) 그는 처음엔 교권 침해 가해자가 됐단 말을 듣고 자녀를 수차례 크게 혼을 냈다고 했다. 자세한 내막조차 변명이라며 알려 하지 않았다. 학교를 믿어서다.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치려고 해도 안 되니까 이 지경까지 왔겠지, 선생님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으면, 그럼에도 학생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문제를 일으켰으면 학교가, 교사가 학생을 가해자로 지목했을까. 억울해하는 자녀와의 몇 번의 심각한 부딪힘과 한 학기 내내 학교에 불려다니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데, 몇달이 지나자 이상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자녀가 가해자로 처벌받은 일 자체가 속상한 건 아니었다. 지인은 누구보다 인권, 약자 보호, 더불어 사는 세상 등의 주제를 생각하고 실천해온 사람이었다. 누군가 상처를 받았다면, 가해자의 의도보다는 그것이 중시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한 건, 이 문제를 처리하는 학교와 교사의 방식이었다. “그냥 있던 반 단톡에 그런 이미지가 올라왔던 거였고,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했지만, 친구와 싸우고 싶지 않아 못 본 척한 것 뿐이다”라는 몇 학생의 항변에 대해 학교와 교사 측은 이렇게 맞섰다고 했다. “친구가 잘못된 행동을 하는 걸 발견했다면, 즉시 교사에게 신고했어야 했다.” 지인이 충격 받은 것은 그 대목이라고 했다. “왜 애들을 안 혼 내?” 지인의 의아함은 거기에 있었다. 학교 안에서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잘못을 했는데, 누구도 혼내지 않았다. 아무리 장난이라도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그것도 외모를 가지고 놀려서는 안된다는 걸, 남의 얼굴을 함부로 캡쳐하거나 합성해선 안된다는 것을 ‘눈물 쏙 빠지게’ 혼내주고, 잘못을 잘못이라 교육하는 사람은 학교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저 ‘규칙을 어겼으니 처벌한다’는 행정처분만 존재했다. 지인은 “이 사건에서 학생들이 학교로부터 직접적으로 배운 건, ‘친구가 잘못하는 걸 발견하면 신고하라’는 것 뿐인 게 이상하다”고 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학교는 학생 인권 침해와 교권 침해의 사이에서 그 어떤 위험도 감당하지 않는 선택을 했다. 소통 없이 규칙만 존재하는 곳에서 학생들은 ‘친구의 잘못은 신고하지 않으면 내가 피해를 입는다’는 것만 배웠다. '진상' 학부모의 민원에 시달릴까 우려하는 학교 측의 입장이나, 충분히 상처 받았을 교사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당사자 교사가 상처를 받았다면 다른 교사가 나서서 아이들에게 알려줘야 했다. 규칙을 어겨서 처벌받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게 잘못된 일이라고. 단순한 장난이라도, 선생님은 이 일로 인해 큰 상처를 받았다고. 선생님의 눈을 보고 사죄하게 해야 했다. 그게 교육이고, 학교에서 아이들의 '장난'에 일어나야 했을 일이다. 학생들은 엉뚱한 교훈을 배웠고, 상처 받은 교사는 사과 받지 못했다. 스승의 빈자리를 규칙이 채울 순 없다 수업 중 스마트폰 사용 금지 법안 관련 논쟁을 보고 지인과의 일화를 떠올렸다. 학교에서 교육이 사라지고 있다. ‘교권 침해’와 ‘학생 인권’ 침해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던 우리 사회는 사회적 소통으로 느리게 채워야 할 곳을 성급하게 규칙으로 채워버렸다. 규칙이 나쁜 게 아니다. 그러나 규칙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곳과 예컨대 규칙이 소통보다 우선하는 곳은 도로 위다. 도로교통법을 지키는 게 개인 간 합의, 대화보다 중요하다. 위급환자 이송 등 급박한 사안이 아니라면 언제나 규칙이 우선이다. 그러나 도로는 만나기 위한 곳이 아니라 지나가기 위한 곳이다. 각자가 서로의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스치기 위해 고안된 곳이다. 어떤 부딪힘이나 병목현상 없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만이 목표인 곳이라, 도로 위에선 규칙이 더 중요해도 된다. 그러나 교실은 아니다. 지난번 <더팁스> 인터뷰에서 AI 철학을 연구하는 김재인 경희대 HK연구교수는 ‘학교는 마음껏 실패하며 인류의 집단지성을 키우는 곳’이라고 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인간관계를 배우고, 우정과 의리를 느끼고, 어른이 되면 하지 못할 고민과 도전을 마음껏 할 수 있어야 한다. 김 교수에 따르면 그래야 ‘인공지능에 대체되지 않는 인간’으로 자라는 인간다움과 지성을 갖추게 된다. 교실은 교실 속 공간 자체가 목적지다. 사랑과 우정, 꿈과 희망은 물론 실패와, 때로는 싸움과 갈등도 목적인 곳이다. 수업 중 스마트폰 사용 금지 법안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건, 수업 중 스마트폰을 사용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수업 중 스마트폰 사용 금지를 ‘법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모든 것을 법과 규칙으로 해결할 순 없다. 특히, 학교에서는 더욱 그렇다. 규칙보다는 대화가, 결론보다는 과정이 중시될 수 있고, 그것 자체가 목적인 세상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던가. 문화와 소통이 사라진 자리의 폐단을 우리는 바르게 보고 있다. 매일 같이 SNS에 목격되는 ‘막장 10대’ 이야기들 사이에 빼놓지 않고 나오는 단어가 있다. ‘촉법소년’. 법이 움직이는 세상은 법 없는 곳 모두를 무법지대로 만든다. 문화와 소통을 채워가야 할 자리에 규칙을 세우면, 사람이 설 자리는 사라진다. 지금 해야 할 것은 왜 사람 간 소통이 사라졌는지다. 수업 중 스마트폰 사용 금지 법안 논란을 시작으로 이제 다시 시작할 때다. ‘학교란 무엇인가’ ‘교육이란 무엇인가’. 규칙 정하기가 아니라, 방향 찾기를 위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