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지털 전환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지만, 그 방향성에 따라 교육의 성격과 결과는 전혀 달라진다. 최근 영국과 미국 등 교육 선진국들이 디지털 기술 도입을 보다 세심하게 접근하는 이유다. 이들 나라에선 기술을 무분별하게 도입하기보단 기술이 학생들의 인격을 배양하고 창의력을 함양하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여기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영국 런던 이스트 바넷 스쿨 (East Barnet School)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이 학교는 구글의 후원을 받아 AI를 활용한 학습실험을 운영하고 있는데, 핵심은 ‘학생 중심 기술’이다. 학생들은 AI를 더욱 풍부한 지적 토론의 도구로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 AI를 활용해 자신의 의견을 가다듬고, 근거가 충분한지 확인한 뒤 이를 두고 다시 친구들과 토론하는 식이다. AI에 단순 질문을 넣어 그것을 답안으로 사용하는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담당 교사는 “기술은 교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더 좋은 질문을 할 수 있게 돕는 도구”라고 강조했다.
미국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캘리포니아의 일부 초등학교에서는 AI 작문도구를 활용한 수업이 확산 중이다. 단순히 AI를 통해 텍스트를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주제에 따라 생성된 글을 분석하고 편집하는 것이다. AI에게 작문을 대신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해당 주제에 대해 AI가 만들어낸 글을 비평하고, 토론하고 고쳐보면서 세심한 작문 능력과 비판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다. 하버드 교육대학원과 MIT 미디어랩이 공동으로 설계한 이 커리큘럼은 “AI는 글을 쓰는 도구가 아니라, 생각을 넓히는 파트너”라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핀란드 헬싱키의 케르바 중등학교(Kerava Secondary School)는 팬데믹 이후 학생 정신건강과 창의력 회복에 초점을 맞춘 ‘AI 슬로우 러닝’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학생들은 AI 튜터를 활용하되, 교사와 주 1회 면담을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 학습 속도보다 학습의 깊이와 감정의 흐름을 우선시하며, 교사들은 데이터를 분석해 학생의 감정 상태까지 모니터링한다. 이 실험은 “AI로 효율을 추구하는 교육이 아니라,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는 교육”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 또한 ‘GIGA 스쿨 구상’을 통해 디지털 학습 인프라를 정비한 뒤, AI 도입에 대해 윤리성과 인간 중심 설계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문부과학성은 지난 2024년 가을부터 교사 대상 ‘AI 윤리 연수’를 의무화하고, 교실 내 AI 도입 여부는 학교 자율에 맡긴다. ‘AI 기술이 아이들의 자유로운 사고와 관계성을 해치지 않도록’ 한다는 게 핵심이다.
이 같은 흐름은 모두 ‘기술은 수단일 뿐, 목적은 인간’이라는 방향성을 공유한다. 반면 한국은 지난 2023년 AIDT 정책을 빠르게 선언하고 불과 1~2년 만에 디지털 교과서 도입, AI 튜터 활용 등 전면 확산을 예고했다. 교육현장에서는 기기 미비, 네트워크 불안정, 교사 연수 부족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민간 플랫폼에 현장을 위탁하는 구조 속에서 현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뒷전이다.
“AI도 교육의 조력자여야지, 주인이 되어선 안 됩니다.” 영국 이스트 바넷 스쿨 소속 교사의 말이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언제나 사람이다. 진정한 디지털 전환은 기술을 통한 인간성의 회복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