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열정 앞에 ‘칠순 할머니’ 다시 ‘소녀’ 되다… 520명 ‘애순이들’ 학교 가던 날
작성 2025-03-12 09:01:38
업데이트 2025-03-12 18:46:51
지난 4일 서울 대흥동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2025학년도 일성여자중고등학교 입학식’에 입학생들이 참석했다. ⓒ사진=일성여자중고등학교

“배움에 대한 간절함과 열정으로 지금의 저는 뜨겁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 속 주인공 ‘애순’은 꿈만 많고 가진 건 없는 소녀다. “대학 가서 시인 되고 싶다”고 염불 외고, 양배추 팔면서도 ‘노스텔지어’를 외치던 문학소녀지만 1960년대 그녀 앞에 놓인 선택지는 둘 중 하나였다. 공장 가서 본가에 돈 부치는 ‘공순이’ 아니면, 시부모와 남편 봉양하는 ‘식모 살이'(모두 극 중 대사다) 하거나. 애순이의 극중 출생 연도는 1951년. 올해 기준으로 75세다. 칠순이 넘은 애순이는 여전히 공부에 목마를까. 지난 4일, 서울 마포아트센터 앞에 색색 한복을 차려입은 오백이십명의 ‘현실 애순이’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자녀 혼사에 참석한 혼주처럼 설레는 표정을 지었지만, 차이점은 이들 자신이 잔치의 주인공이라는 데 있다. 이들은 올해 일성여자중고등학교(이하 일성여중고) 신입생을 환영하러 모인 재학생들이다. 일성여중고는 학업을 마치지 못한 여성들이 중고등교육을 받고 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하는 학력인정 평생학교다. 이날 중학교 280명, 고등학교 240명 등 총 520명이 ‘신입생’으로 이름을 올린다. 최고령 학생은 80대 정숙자씨다. 정숙자 학생은 81세 나이로 중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입학식에는 5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신입생과 이들을 축하하기 위한 재학생들이 자리했다. 주름진 얼굴에 머리는 희끗했지만 여느 소녀들처럼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생기가 넘쳤다.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고등학교 입학식을 치르는 학생들은 낯익은 얼굴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고, 홀로 자리를 지키며 주변을 둘러보는 이들은 대부분 중학교 입학생이었다. 희끗한 머리만 빼면, 영락없이 새 학기를 맞이한 소녀였다.

입학식이 진행되는 마포아트센터 입구에서 입학생과 방문객을 맞이하는 재학생들 ⓒ사진=일성여자중고등학교

 

◇’여자라서, 가난해서…’ ‘못 배운’ 설움 풀러 왔지요

“오늘 일성여자중고등학교 520명 신입생 일동은 학교의 규칙을 충실히 지키며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착실히 실천해 가정과 사회와 국가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여성으로서 지식과 소양을 쌓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학생 대표가 입학생 선서를 낭독하자, 나머지 학생들이 우렁차게 “선서!”라고 외쳤다. 반짝이는 눈과 힘 있는 목소리가 씩씩했다.

눈물을 보이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간 자신의 배움보다 먹고 살기를 앞세워온 세월을 나누면서다. 축사로 강단에 오른 중학교 2학년 임영숙(65) 학생은 “여자는 얌전히 커서 좋은 남자 만나 시집 잘 가는 게 축복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며 “아이들 학교에서 부모님 학력을 적으라는 알림장이 올 때면 ‘초졸’이 부끄러워 ‘중졸’로 적었다”며 그간의 설움을 고백했다. 몇몇은 눈물을 훔치며 공감했고, 임영숙 학생의 “14살 소녀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지금에 감사하다”는 발언이 이어지자 커다란 박수소리가 서로를 응원하듯 입학식장을 가득 채웠다.

환갑이 넘은 몸으로 멀리서 학교를 다니면서도 배움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겠다는 다짐도 이어졌다. 매일 수원에서 마포구까지 등교한다는 김경란(64) 학생의 하루는 새벽 3시 30분에 시작한다. 집안일을 대강 마치고 5시 20분에 집을 나섰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늦은 오후다. 김 학생은 “편찮은 어머니 대신 어린 시절부터 가족 생계를 책임지며 살아왔다” 면서 “고작 열여섯 나이에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수면제 30알을 삼키기도 했다”고 했다. 그는 “몸은 녹초가 되지만 학생으로 살 수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했다. 김 학생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 졸업장까지 따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교무부장에게 특별 시상을 받는 최고령자 입학생 중학교 1학년 정숙자(81) 학생과 최고 원거리 통학자 고등학교 1학년 장주선(71) 학생 ⓒ사진=일성여자중고등학교

 

◇5시간 통학, 10번 가까운 수술도 꺾지 못한 ‘배움의 열정’ 

일성여중고는 학력인정고지만 만학도에게 만만한 곳은 아니다. 일반 중고등학교가 각 3년에 걸쳐 진행하는 교육과정을 각 2년만에 끝마쳐야 한다. 거기다 대부분 환갑이 넘은 데다, 알파벳은 커녕 한글도 떼지 못한 경우도 많아 일반 중학생보다 기초 학업 준비도가 낮은 편이다. 여기에 많은 나이로 오는 신체적 어려움도 빼놓을 수 없다. 50대는 ‘어린이’ 취급 받는 만학도들 사이, 오래 앉아 있기 힘든 허리, 관절 통증이나 자주 ‘깜빡’ 하는 정도는 명함도 못 내민다. 그런데도 졸업생 전원이 19년 연속 대학까지 진학했다.

이런 성과엔 학생들의 꾸준한 배움을 독려하기 위한 학교 차원의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보조 교사를 지원하거나 합창·연극·국악 등 다양한 동아리 활동을 지원하고 영어 말하기·시낭송 등 각종 대회를 통해 학생 간 친목과 자아실현까지 돕는다. 김상현 일성여중고 교무부장은 “학생들의 열과 성을 보며 학교 관계자들이 매일 감동을 받는다”면서 “최선을 다하는 학생들을 보면, 조금이라도 더 돕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레 솟아난다는 게 교사와 직원들의 공통된 마음”이라며 공을 학생들에게 돌렸다.

가장 먼 곳에서 오는 학생은 71세인 장주선씨. 장주선 학생은 강원도 춘천에서 통학하는데, 꼬박 다섯 시간이 걸린다. 그럼에도 배움을 포기할 수 없던 이유는 뭘까. 그는 “최선을 다해 살며 능력을 인정받아도 배우지 못했다고 늘 차별 속에 서럽게 살았다”면서 “목표한 대학 졸업장을 손에 넣을 때까지 포기는 없다”며 열정을 보였다.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의 건강 상태에도 학업을 놓지 않는 학생도 있다. 김묘순(74세) 학생은 허리 수술만 5번, 양쪽 무릎 인공관절 교체 수술에다 양쪽 어깨 파열 수술, 여기에 당뇨까지 겪으면서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주변에서도 ‘일단 몸부터 살피라’ 성화였다. 그러나 김 학생은 “공부를 놓지 않겠다는 의지 덕에 건강까지 회복했다”고 했다. 그는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규칙적 운동을 놓지 않았더니 인슐린을 맞지 않아도 될 정도로 건강이 좋아졌다”면서 “학교를 다니며 배움과 건강 모두를 얻었다”며 활짝 웃었다.

입학식에는 ‘어머니’, ‘할머니’, ‘아내’가 아닌, ‘여중생’과 ‘여고생’으로 돌아간 학생들을 응원하기 위해 모인 가족 모습도 보였다. 중학교 1학년이 된 할머니의 입학식을 지켜보던 중학교 2학년 손녀 백지효(15)양의 마음도 뭉클했다. 그는 “가족 모두 할머니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중학교 공부가 쉽지 않은데, 입학 후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온 가족이 도울 것”이라며 선배로서 따뜻한 응원을 보냈다.

입학식 마지막, 이성순 학생이 낭독한 축시가 울려퍼지자 학생들의 눈가도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이날 축시는 정호승 시인의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였다.

“눈 내리는 보리밭길을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가득히 봄을 받아라”

학생들 몇은 싯구를 따라 읊조리거나 적어두기도 했다. 평균 연령 65세의 학생들 가슴 가득히, 배움의 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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