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재교육, 비상교육 등 국내 굵직한 에듀테크 기업들의 대만 진출 소식이 속속 들려오고 있다. 전통적으로 교과서를 만들어온 이들 기업뿐 아니라 앱 기반 에듀테크 기업 ‘말해보카’ 등도 대만 앱스토어 진출을 완료했다. 업계에선 이들처럼 대만에 진출하는 한국 에듀테크 기업이 점점 늘어날 것이라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한국 AI 디지털 교과서(AIDT) 사업이 사실상 좌초되면서,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교육 분야 디지털 전환을 추진하고 있는 대만에서 활로를 개척하려는 기업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대만과 우리나라의 에듀테크 정책의 가장 큰 차이점은 명확하다. 대만엔 있고 한국엔 없는 게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바로 국가 차원의 ‘디지털 전환’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다. 교육 분야 디지털 전환에 대한 원칙은 국가 디지털 전환 정책과 장기 계획 안에 포함돼야 하는데, 우리나라엔 애초에 디지털 전환 비전 자체가 없다. ‘IT 강국’ ‘인터넷 인프라 강국’이라는 허상 같은 수식어만 있을 뿐이다.
교과서냐, 보조 교재냐 싸우는 사이… ‘미래 디지털 전환 계획’ 착실히 세운 대만
우리나라가 자화자찬에 빠져있는 사이, 대만은 2017년부터 ‘DIGI+’라는 이름의 장기 국정 디지털 전략을 발표하며 착실하게 디지털 전환을 준비해왔다. DIGI+는 단순히 특정 분야에 디지털 보급률을 늘린다는 정도의 내용이 아니라, 디지털 인프라를 포함해 인재 양성·거버넌스·인권·도시·글로벌 등 6개 주요 아젠다를 중심으로 디지털을 기반으로 미래 대만 사회를 어떻게 꾸려갈지에 대한 구상과 철학이 담긴 프레임워크다. 이런 사회 전반적인 미래상에 맞추어 대만 교육부는 다시 ‘디지털 학습 강화 계획 (Digital Learning Enhancement Plan·DL)’이라는 교육 분야에 대한 세부 지침을 발표했다.
이 계획 안에는 사회 변화에 맞추어 대만 교육의 디지털 전환에 대한 총체적 계획이 담겨 있다. △디지털 인프라 및 장비 제공 △디지털 콘텐츠 및 학습 플랫폼 개발 △교사 및 학부모 역량 강화 △빅데이터 기반 학습 분석 △AI 교육 생태계 및 글로벌 협력 네트워크 구축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국가 주도로 각종 디지털 학습 관련 플랫폼을 운영한다. 적응형 AI 플랫폼인 ‘TALP’를 통해 빅데이터 기반 개인 맞춤 학습 경로를 제공하고, 여기서 만들어진 정보를 다시 수집해 정책을 진단, 개선하고 교사가 활용할 수 있는 보조 자료도 제공한다. 또한 교사와 학생이 참여하는 오픈 플랫폼 ‘TELP’도 있다. 이외에도 AI 기반 교육에 대한 교원 연수는 물론이며 교사와 학부모가 지침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각종 가이드라인도 제공한다. 이를 지원하기 위해 각 지방정부에는 디지털 학습지원실도 운영된다. 여기에 들어간 돈만 한화로 9200억원 이상이다.
이 같은 노력으로 이미 대만의 전국 초중등 학교에는 스마트 기자재와 태블릿 공급이 완료됐다. 수업 중 진단, 피드백을 포함한 AI 기반 디지털 교육도 시작됐다. 물론 아직 높은 수준의 디지털 교육이 정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AI 교과서 도입을 급작스레 추진했다가 취소하는 우리나라보다 한참 앞선 상황은 분명하다. AI 교과서 분야 민관협력도 속속 진행 중이다. 관이 나아갈 방향과 철학을 설정하고 주도적으로 인프라를 만들고, 소프트웨어 분야에 민간 입찰을 통해 디지털 교육을 풍부하게 만드는 식이다. 쉽게 말해, 개별 에듀테크 회사들이 디지털 콘텐츠 및 소프트웨어 제작에 입찰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열어둔 것이다. 이 분야 예산도 약 2500억원 이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교육 노하우가 대만으로 빠져나간다
이런 상황을 보면, 국내 에듀테크 기업이 살길을 찾아 대만으로 떠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인데도’ 국내 사업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 비합리적으로 보일 정도다. 기업이 경영 활동을 영위하는 데는 정치적 안정성이 필수다. 특히 교육 분야처럼 정책의 영향이 큰 분야 산업군에게는 우리나라의 AIDT 정책처럼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정책은 업계 관계자들에겐 거의 ‘재난 상황’에 준하는 위기다. AIDT 교과서가 교과서가 아닌 보조 교재로 사용될 것이 거의 기정사실화 됐으면서, 향후 계획도 분명하지 않은 국내에 매달리기보단 상황이 안정적인 해외 진출하는 게 합리적이다.
이런 진출은 단기간엔 긍정적인 시그널로 보일 수 있다. 단편적으론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이기 때문이다. 이미 에듀테크 기업들이 해외 시장에서 활로를 찾는다는 기사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해당 분야가 ‘국가의 백년대계’를 좌우한다는 교육 분야인데다 우리나라에서 역량 있는 에듀테크 회사나 전문가 수가 한정됐다는 데 있다. 이들이 그간 쌓은 기술적, 교육적 노하우로 대만의 AI 디지털 교육 활성화에 기여하는 사이, 우리나라의 교육 분야 디지털 전환은 여전히 정치가 불러온 미궁 속에 갇혀 정체되고 있다는 점은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의 디지털 전환 논의가 ‘교과서냐, 보조 교재냐’에 갇혀 있는 동안 대만은 미래 교육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미 한참 앞선 대만의 교육 분야 디지털 전환은 대한민국 에듀테크 기업의 노하우라는 날개까지 달았다. 대만의 TSMC가 반도체 분야에서 앞서나간 격차를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총력을 다해도 따라잡기 힘든 상황이다. 교육에서도 뒤쳐지면, 10년 후 대만과 한국의 세계적 위상은 어떻게 역전될지 가늠할 수 없다. 어쩌면 지금이 백년지대계를 준비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