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은 석사 1년차의 평범한 날이었다. 평소처럼 수업을 듣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교수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강의실 안의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정적. 이내 소리가 돌아왔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그 후에도 잠깐씩 정적이 찾아왔다. 그로부터 한 달 후, ‘감각신경성 난청’을 진단 받았고 10년에 거쳐 서서히 청력을 잃어갔다. 간혹 한두 단어가 들리지 않을 뿐이었는데 어느새 한 단어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 돌이켜보니 장애인이 되어 있었다.
김은정(41) 설치미술가 얘기다. 그는 25살에 청각 상실을 겪은 중도장애인이다. 갑작스레 장애인이 되자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했다. 술자리와 친구를 좋아하던 발랄한 여대생은 모든 소통을 끊고 방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혼자 방안에 골몰하고 있었다. 우연히 바닥에 떨어져 있던 망사 천에 손이 닿았다. 소리가 없는 생활 속에서 전보다 훨씬 예민해진 촉감이 느껴졌다. 홀린 듯 망사 천으로 공간을 꾸미기 시작했다. 조각을 하던 미술학도가 설치 미술가로 재탄생하는 순간이었다.
2010년, 소리가 사라진 세계 속에서 본격적으로 설치 미술의 길에 들어선 그는 2024년 서울장애예술창작센터의 14기 입주 작가가 되었다. 2024년 9월 26일~ 2024년 10월 15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에서는 서울장애예술창작센터 입주 작가들의 단체전 <기울기 기울이기>가 개최됐다. ‘모두가 가진 다른 기울기’라는 주제에 대해 김은정 작가는 <천상의 숨결:샤샤>라는 작품을 공개했다.

– <천상의 숨결: 샤샤>는 어떤 작품인가요?
“귓속말에 대한 강렬한 기억을 공간으로 표현한 작품이에요. 청력을 잃고 나서 가까운 사람들이 누군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일이 많아졌어요. 그때, 소리보다 먼저 온기와 숨결이 느껴지더라고요. 귓가와 뺨에 닿은 온기가 온몸에 쏟아지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 순간을 계속해서 떠올리며 작업했습니다.”
– 저도 작품을 직접 봤는데, 귓속말이 직관적으로 느껴져서 신기했어요. 작업 과정에서 어떤 부분을 신경 쓰셨는지 궁금해요.
“숨결이라는 추상적인 감각이 잘 느껴질 수 있도록 ‘튈(tulle)’이라는 아주 얇고 가벼운 천을 여러 겹 겹쳐서 사용했어요. 그리고 수채화 물감이 퍼지는 듯한 색상은 숨결이 제게 닿는 순간 번지듯 변화하는 감각을 표현했죠. 천장은 하얀색 천으로 느슨하게 늘어뜨려서 마치 온기에 갇힌 듯한 느낌이 들도록 했어요. 또 그 공간 안에서 천과 몸이 스치면 ‘사사삭’하는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는 누군가가 귀에 대고 속삭이는 소리처럼 들릴 거예요. 시각, 촉각, 청각 모두 사용해서 감상할 수 있도록 신경 썼습니다.”
– 촉각을 이용해서 소리를 만들어내는 건가요?
“맞아요. 그게 바로 제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에요. 듣는 것 대신 보고, 느끼니까요. 조용한 세상에서 피부로 감각하는 언어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보고 느낀 세상을 ‘공간’으로 표현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보통 제 공간은 침묵으로 가득해요. 그런데 감각의 변화를 느낄 때면 감각이 침묵을 밀어내고 제 몸을 뒤덮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제가 느낀 감각을 공간으로 만들고 사람들이 그 속에 들어와 저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랐어요.”
– 작가님의 작품은 모두 감각에서부터 시작하나요?
– 네. 명확히 말하자면 ‘제 몸이 원하는 감각’이에요. 어떤 것을 느끼고 싶은지 떠올리고 그에 맞춰 재료를 골라요. 같은 천이라고 해도 그 무게와 질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느낌을 내거든요. 청력을 잃고 시각과 청각에 예민해져서 가능한 일이죠. 소재를 고르는 데도 많은 시간을 씁니다. 하나하나 만져보면서 소재가 주는 직감을 느껴봐요. 작업 과정은 적막 속에서 제 온몸의 감각을 끌어내는 일이에요.”
– 청력을 잃고 새로운 예술을 만난 거네요.
“맞아요. 사실 적막에만 집중하다 보면 세상에 혼자 내던져진 것 같다는 불안감이 몰려오는데 부드러운 소재를 만지며 작업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래서 지금의 제 일을 너무 사랑해요.”
◇ 청각장애 판단 후 오랜 꿈 조각가 포기했더니… 설치미술 새 삶 열리더라
김은정 작가의 원래 전공은 조소다. 조각가의 꿈을 키워왔지만, 청력에 장애가 생긴 후 포기했다. 모순적이게도 조소로 인한 소음이 너무 ‘시끄러워서’다. 보청기를 착용해야만 일상생활이 가능했는데, 보청기가 소리를 증폭시키다보니 조각 과정에서 나는 소음이 지나치게 크게 들려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청각장애가 생긴 후에, 조소가 너무 시끄럽게 느껴졌다고요?
“정확히는 청각장애로 인해 보청기를 착용하게 된 후죠. 조소에는 조각을 두드려 부수는 과정이 필수적인데, 보청기는 작은 일상 속의 소리도 크게 키워 들리게 해서, 조각 과정에서 나는 소리들은 너무 크게 귓속을 울리게 되죠. 아이러니하게도요. 그러다보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상심이 크셨겠습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장애를 얻고 나서 바뀐 게 있어요. 장애가 생긴 내 몸을 부정하기보다 바깥의 소리가 없어진 세상에서 내 몸이 어떤 상태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깊이 들여다보기로 한 거죠. 그러다보니 다양한 촉감의 털실, 천을 만지면서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설치미술이란 길을 찾게 됐으니까요.”
-설치미술을 처음부터 다시 배운 건가요.
“처음에는 설치 미술의 기법도, 작업 순서도 모르는 채로 그냥 재료를 가지고 놀듯이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2010년에 뉴욕의 SVA(School of Visual Arts)에서 본격적으로 설치미술을 공부했어요. 설치미술 자체도 새로웠지만, 한국과 다른 미국의 자유로운 예술 분위기도 큰 충격이었어요.”
– 어떻게 달랐나요?
“‘예술은 이래야한다’는 고정관념이 없었어요. 한번은 돌아가면서 각자의 작품을 소개하는 시간이었는데, 한 학생이 옷을 다 벗고 페인트를 마셨다가 뱉는 퍼포먼스를 보였어요. 저는 너무 충격이었는데 다들 아무렇지 않게 보고 피드백을 주더라고요. 그 퍼포먼스도 충격이었지만 그 퍼포먼스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정말 큰 영감이 됐어요. ‘여기선 내 이야기를 내 방식대로 해도 되겠다’고 생각하게 됐죠.”
– 용기가 생긴 거군요.
“당시 청력이 사라지고 있을 때라 듣는 사람에서 듣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혼란이 컸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달라진 제 감각 방식에 대해 예술로 이야기 할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겼어요. 장애를 받아들이고 저만의 예술관을 만들어가는 데 큰 계기가 됐죠.”
– 앞으로의 포부가 궁금합니다.
“다정함을 말하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특히 청력을 잃고 세상에 혼자 버려졌다고 느낄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저를 일으켜 세우는 건 우연한 다정함들이었어요. 앞에서 이야기했던 작품 <천상의 숨결: 샤샤>도 보청기를 낀 저를 배려해 누군가 귓속말로 말을 걸어왔던 기억을 표현한 작품이에요. 제 작품이 그런 따뜻함과 다정함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김은정 작가는 청력이 떠나갔던 지난 10여년의 시간 동안 여러 변화를 경험했다. 듣는 사람에서 듣지 못하는 사람으로, 조각가에서 설치 미술가로. 그는 “내 몸이 살아있는 순간을 미세하게 느끼며 작업할 수 있어 기쁘다”며 웃었다. 떠나버린 소리를 쫓는 대신, 변화를 수용하고 과감히 도전한 그녀는 “인간 김은정과 예술가 김은정, 그리고 장애인 김은정을 분리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가 듣는 것을 대신해 느낀 여러 감각은 앞으로도 꾸준히 그녀의 작품으로 재탄생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