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5일부터 17일까지 3일간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제22회 대한민국 교육박람회’ 현장. 아시아 최대의 교육 박람회를 표방하는 현장에는 총 22개국 578개사가 참여했고 약 5만여명이 현장을 방문해 북새통을 이뤘다. 가장 주목을 받은 곳은 단연 ‘AI 디지털 교과서(AIDT) 특별관’이다. 이곳에는 ▲천재교과서 ▲아이스크림미디어 ▲비상교육 ▲금성출판사 ▲클래스팅 ▲미래엔 ▲와이비엠(YBM) ▲동아출판 ▲지학사-아이헤이트플라잉버그스 ▲교학사-아이헤이트플라잉버그스와 같은 AI 디지털 교과서 검정 통과 기업 10곳이 참여해 각자가 준비하는 AI 맞춤형 학습 시스템과 미래 교육을 선보였다.
많은 인파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AIDT 특별관 곳곳을 살폈으나, 10곳의 AIDT 검정 통과 기업들의 표정은 다소 복잡했다. 지난달 26일 국회가 AIDT를 당초 안이었던 ‘교과서’에서 ‘교육자료’로 강등시키기로 하면서 각 기업마다 최소 2년간 수십억을 투자해 만든 AIDT 교과서가 제대로 쓰이지도 못한 채 폐기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퍼진 탓으로 짐작됐다. 이대로면 수십억의 투자금과 함께 AIDT로 추후 사업의 향방을 결정하고 채용, 사업 기획을 준비해온 모든 것들이 허공으로 날아가기 때문이다. 손실은 그대로 민간기업이 떠안는 구조다.
이런 상황 속에서 AIDT 특별관에 참여한 기업들은 손바닥 뒤집듯 정책을 뒤집은 정부에 불만을 토해내면서도 개별 기업의 이런 발언이 정부에 밉보여 더 큰 불이익을 가져올까 우려하는 모습이었다. 일부 기업들은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며 거부하거나, 기자가 시연에 참여하는 것조차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무슨 말을 듣고 싶어 그러냐”는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손바닥 뒤집듯 정책을 뒤집은 정부에 분노하면서도, 정부와 면밀히 협업해야 하는 상황에서 말 한마디로 더 큰 ‘나비효과’를 불러올까 걱정하기도 했다. 이들의 상황을 배려해, 더팁스는 현장에서 만난 관계자들의 목소리를 익명으로 담았다.
“교육자료라고? 지금 장난하나”
AIDT 개발사에서 일한다는 한 관계자는 현 상황에 대해 거친 ‘마음의 소리’를 내뱉었다. “2025년 AIDT 도입을 큰 소리 칠 때는 언제고, 이제와 학교 재량에 따라 AIDT를 선택적으로 사용하라는 정부에 분통이 터진다”면서 “정부를 믿고 개발한 회사들은 휘청일 정도”라며 분노를 표했다. 다른 관계자들도 “황당하다”는 입장은 마찬가지였다. “도입 1,2년 전도 아니고 교과서 검정까지 다 마친 상태에서 이러는 게 말이 되나요”라며 당황스런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개발사들은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라, 그간의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되는 게 허무하다고 입을 모았다. 한 관계자는 “완벽한 준비를 위해 ‘iOS 11 버전’까지 낮춰서 테스트하는 것은 물론, 각 학교를 돌아다니며 네트워크 환경까지 일일이 확인했다”며 “오랜 기간 밤을 지새우며 준비한 게 손바닥 뒤집듯 한 번에 물거품이 되니 너무 속상하다”고 토로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AIDT 개발 과정은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걷는 시간이었다”며,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참고할 만한 사례가 없어 난관이 많았는데, 새로운 교과서를 만든다는 사명감으로 혼신의 힘을 쏟았다”고 했다.
개발사들은 하나같이 “정부의 일관성 있는 정책을 원한다”고 입을 모았다. 현장에서 만난 한 관계자는 “이제 해탈했다”면서 “어차피 개발사들은 정부가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없다”면서 “교과서가 되지 않아도 좋으니, 이제 더 이상 번복만 하지 않길 바란다”며 다소 무력하게 말했다.
“교육자료로 격하되더라도 계속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시작된 AIDT 사업을 이어나간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한 AIDT 개발사는 애초에 “기존 서책과 병행해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발했다”며 앞으로의 계획에 큰 차질은 없을 것이라고 나름의 대응책을 발표했다. “교육자료로 활용할 경우 형식 제한이 많은 교과서에 비해 더욱 다양하고 유연한 학습을 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했다. 다만 이런 긍정적 반응은 현장에서 소수의 목소리로 보였다. ‘투자비용 회수’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한 관계자는 “교과서로 의무도입이 되지 않으면 수익 회수가 되지 않는다”면서 “많은 인력을 채용하고 최소 수십억을 투자한 회사들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고 했다. 이들은 “AIDT는 서버 관리, 환경 구축, 콘텐츠 수정 등 일반 교과서에 비해 비용이 수십배는 더 들어간다”면서 “(만에 하나 채택이 되지 않더라도) 업체가 입은 손해는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 준비 덜 된 AIDT, 도입 성급한 면 있어”
일부 관계자는 AI 교과서의 장점과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한 사람들도 있었다. AIDT 도입이 급하게 추진되면서, 제반 제도나 학교 환경과의 조율, 도입 범위 등을 충분히 논의할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 한 AIDT 개발사 관계자는 “‘500만 명의 학생들에게 500만 개의 교과서를 제공한다’라는 AIDT의 취지는 현 교육 상황에 꼭 도입이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제반 준비가 된 상황에서 도입됐다면 더 좋았을거라고 (솔직히) 생각한다”고 했다.
전반적인 준비가 덜 된 상황에서 정부가 AIDT를 밀어붙였다는 비판도 나왔다. 충분한 사회적 합의나 토론 과정 없이 결과물만 재촉한 정부의 태도가 만들어낸 ‘예견된 논란’이라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AIDT 도입을 위해 교사나 학부모 및 전문가 의견을 수렴하고 제반 상황을 준비하는 데만 1년 이상이 필요했다”면서 “그런데도 촉박한 도입 일정을 (정부가) 제시해 개발 일정이 너무나 급하게 이뤄졌다”고 했다. 또 다른 개발사 관계자는 “디지털 교과서 개발은 신규 서책형 교과서 개발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며 “디지털로 넘어가는 방식 전환에 대한 논의부터, 디지털 전환 자체를 위해 서버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맞는 교수 학습 시스템을 만드는 등 훨씬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들은 “당장 6월까지 초등5, 6학년용 AIDT를 제출해야 하는데 정부의 정책이 오락가락해 안 그래도 빠듯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한편 21일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가 AIDT를 교육자료로 규정한 ‘초중등교육법 개정안’ 거부권을 행사하며 AIDT 지위를 둘러싼 싸움은 다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