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낮에는 반도체 회사에서 치열하게 마케팅을 하다, 밤에는 고전 철학을 편다. “메모리가, 램이…” 하다가 퇴근 후엔 “공자가 말하길, 제갈량이었다면” 한다. 하루 사이에 첨단과 전통을 횡단하며 수천년을 훌쩍 뛰어넘는 셈이다. <오십에 읽는 맹자>,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논어를 읽다> 등으로 잘 알려진 조형권(51) 작가 얘기다. 조 작가는 고전 철학을 알기 쉽게 풀어주는 작가이자 강사로 이름났지만, 이는 그의 ‘부캐’다. 고전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으레 학자로서 방 안에서 책만 읽었을 것 같지만, 실은 조 작가는 누구보다 치열한 산업의 최전선에서 커리어를 쌓아왔다.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등 누구나 선망하는 대기업에서 23년간 근무했다. 잘 나가는 회사원이 ‘어쩌다’ 고전에 꽂힌 걸까.
12일 서울 구로동 넷마루 사옥에서 만난 조 작가는 이 질문에도 고전 철학으로 답했다. “‘일이관지(一以貫之)’란 말이 있습니다. 하나로 모든 것을 꿰뚫는다는 말이지요. 반도체는 첨단 산업이지만 결국 그것을 만드는 건 사람입니다. 고전 철학엔 수천년간 사람이 살아오면서 남긴 삶에 대한 통찰의 정수가 담겨 있지요. 직장생활을 하면서 답답할 때마다 고전 철학을 보며 위로와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과거와 현재는 결국 통하는 것처럼, 반도체의 문제도 고전 철학으로 풀 수도 있는 거지요.”
◇젊은 시절 바친 조직 생활 회의감 몰려올 때… 논어가 나를 살렸다
-처음 고전에 빠지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모든 직장인이 그렇겠지만, 마흔 즈음이 되니 문득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30대를 회사에 바치며 열정적으로 일해왔는데 무엇이 남았나 하는 회의감이 드는 거죠. 특히 대기업은 조직이 아주 크고 경쟁이 심하다 보니, 내가 없어도 잘 굴러갈 것 같은 조직에서 내 존재 가치를 계속해서 증명해야 해요. 조직 안에서 내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정체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기보다 더 빨리 승진하지 못하면 결국 사라질 것 같은 초조함이 함께 오는 겁니다. ‘눈 뜨면 출근해 돈 버는 기계 같다’ 라거나 ‘동기 사이에서 두각을 내지 못하면 밀려나는 패배자’라는 생각이나 사내 정치에 마음이 너무나 괴로울 때 우연히 책장 속에 있던 <논어>가 눈에 들어왔어요. 홀린 듯 읽다보니, 거기서 나온 한 구절이 마음에 확 꽂혔죠.”
-어떤 말이었나요?
“‘불환인지불기지(不患人之不己知)’라는 말입니다. 논어의 첫 번째 편 ‘학이’의 마지막 장에서 공자의 말인데,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구절을 읽으며 조직에서 받는 인정에 목메지 말자, 그에 흔들리지 않는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회사에 인생을 걸고, 회사가 전부라 생각했던 ‘우물 안 개구리’가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순간이었죠(웃음).”
-그때 그 문장이 마음에 들어온 이유가 있을까요.
“당시 지친 저를 깨우쳐 줄 가르침을 간절히 구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2,30대에는 저도 ‘고전 따위는 지루하다’며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꼭 필요한 때에 옛 성인의 목소리가 제 마음을 울렸다고 할까요. 어쩌면 매너리즘과 패배감 등 무기력에서 벗어나 ‘살기 위해’ 고전에 매달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 년 만에 고전 철학서만 200권은 읽었으니까요.”
-위로가 되던가요.
“그럼요. 특히, 공자와 맹자 역시 자신들이 살면서 가장 힘들 때 고전 철학을 집필했단 걸 알고 나서 더욱요. 철학은 위기와 암흑 속에서 더욱 빛난다는 걸 절절하게 체감했습니다.(웃음)”
-삶도 변했을까요.
“사내 정치에 휘말리지 않고 ‘중용’의 덕을 가질 수 있게 됐어요. 큰 회사를 오래 다니다보면, 정말 똑똑한 사람들 중에 ‘반짝’ 떠올랐다가 크게 미끄러지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공통적으로 당장 눈 앞의 이익을 따르고 그를 위해 사내 정치도 마다하지 않더군요. 중용이란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말고 내 중심을 찾으라는 가르침인데, 이를 마음에 새기지 않았다면 저 역시 당장의 영예를 위해 신념을 내려놓고 편 가르기, 줄 서기에 휘말릴 수도 있었겠죠. 그러지 않아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게 됐습니다.”
-회사 생활에도 직접적인 도움이 됐단 말입니까.
“당연하죠. 중용의 핵심 가치가 바로 ‘성실’입니다.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실을 갖춰야 그 본성을 다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단기간에 쉽게 목표를 이루려는 조급함을 버리고,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히 수행해내는 자세를 지키려 노력하게 됐습니다. 회사에서 인간관계가 꼬이더라도 차분히 내가 할 일을 먼저 하고, 주변을 돌아보니 실수도 줄어들고 감정 기복도 줄어드는 거죠. 주변 사람을 돌볼 여유도 생겼습니다.”
◇‘직장인’ 정체성은 고전 철학 작가, 강사로서 큰 힘…‘공감’ 나누고파
살기 위해 읽었던 고전 철학은 그에게 뜻밖의 새로운 세상도 열어줬다. 매일 업무를 마치고 고전의 한 구절을 읽고 인터넷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회사 생활 속에서 생겨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려 고전 철학을 탐독하고 그에 대한 생각을 남겼더니,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힘이 됐다’, ‘위로를 받았다’는 반응에 심장이 뛰었어요.” 자신과 같은 고민을 가진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조직 내 인간관계와 직장 생활을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고전 철학으로 응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인 조형권이 작가 조형권으로 새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대기업 임원에서 작가까지, 원하는 일마다 술술 풀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웃음). 인터넷에 올린 글을 보고 출간 제의를 받은 게 아니라, 제가 여기저기 투고를 해서 출판을 해냈어요. 회사 업무 외 시간은 전부 도서관에서 글을 쓰는 데 썼어요. 여가시간이 없다보니 가족들에겐 원성을 많이도 샀죠. 그렇게 글을 모아 100군데에 투고하고서야 겨우 ‘출간 작가’가 됐습니다. 감사하게도 첫 책이 나오고 난 후에 출판 기회가 쭉 이어져 지금까지 6권을 냈고, 이후 고전철학 관련 강사로도 활동하게 됐습니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것 같은데요.
“바쁜 건 사실이지만, 직장 생활을 하지 않고 있다면 지금과 같은 글을 쓸 수 없었을 겁니다. 사람들이 제 글이나 강연을 좋아하는 건,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조직 내에서의 희로애락을 경험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 경험을 토대로 고전 철학을 이야기하니 일반인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거죠. 내 일상이나 회사 생활과 고전 철학이 동떨어진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니, 많은 분들이 ‘고전도 쉽게 느껴진다’거나 ‘제대로 읽어보겠다’고 말씀을 해주세요. 그럴 때 보람을 느낍니다.”
-직장인이란 점이 작가, 강사 생활에도 도움이 된 셈이네요.
“고전은 아무래도 자기수양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일단 진심으로 그 내용이 마음에 와닿아야 해요. 조직 생활 경험을 녹여 설명하니 어렵다고만 생각한 고전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춘 것 같아요. 회사 생활을 하지 않는 전업 학자나 교수님이라면 저보다 더 깊은 내용을 설명해주시겠지만, 저는 실제 직장 생활 속의 상황을 빗대어 설명하거나 ‘그럴 땐 이렇게 해 보시라’고 할 수 있으니 작가, 강사로서 공감을 사는 덴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고전에서 직장생활의 제 1 덕목을 찾는다면요.
“자신을 돕는 이들을 아끼고, 그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죠. <삼국지>의 ‘조조’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입니다. 조조의 책사로 유명한 ‘순욱’은 본래 조조의 라이벌인 ‘원소’의 수하였습니다. 그런데 공을 인정하지 않는 원소의 사람됨에 실망해 조조에게 넘어왔는데요. 이때 조조는 순욱이 찾아오자 맨발로 뛰어나가 “이제야 나를 찾아왔구나”하며 그를 반겼습니다. 순욱은 훗날 조조가 원소를 이기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조조는 이런 식으로 제 사람을 귀하게 여기며 승리의 발판을 다졌습니다. ‘조홍’과 ‘곽가’와 같은 인물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흠을 잡히기도 했는데, 조조는 이들을 내치지 않았죠. 이 두 사람 역시 이후 수많은 전쟁에서 공적을 세웠습니다. 누구도 혼자 일할 수 없죠. 조조처럼 충분히 능력과 잠재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귀하게 여기고, 믿어주는 태도가 결국 자신을 승리로 이끌 겁니다.”
조형권 작가는 자신의 인생을 지키는 고전의 말을 묻자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라고 답했다. ‘덕이 있는 자는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이다. 조 작가는 “쉽게 말해 베풀고 살라는 뜻”이라며 웃었다.
조 작가는 스스로를 ‘증자’에 비유했다. 그는 “증자는 공자에게 ‘아둔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융통성이 부족한 인물”이라며 “그 대신 끈기가 뛰어나 끊임 없이 노력해 결국 공자의 학문 계승의 일등공신으로 인정받았다”고 했다.
“뒤늦게 빠져든 고전 철학이지만 증자처럼 꾸준히 돌아보고 성실히 아는 것을 나누고 싶어요. 앞으로는 고전 철학뿐 아니라 25년 가까이 일해온 ‘반도체’에 대한 지식도 아낌없이 나눌 생각입니다. 물론 단순히 정보만 전달하는 데서 그치진 않을 겁니다. 국가의 중요 산업으로 반도체가 떠오른만큼, 고전 철학의 가르침대로 ‘사람을 귀하게 여기며’ 발전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울 겁니다.”
조형권 작가는
前) SK 하이닉스 GSM Biz MI 그룹 임원
前) 삼성전자 DS 메모리 반도체 마케팅 및 전략 및 IR 업무
<오십에 읽는 맹자>, <치밀한 리더의 한 수>, <죽음 앞에 섰을 때 어떤 삶이었다고 말하겠습니까>,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논어를 읽다>, <적벽대전, 이길 수밖에 없는 제갈량의 전략 기획서> 등 저자
넷마루 <인생을 바꿀 쉬운 논어> 강의
고려대학교 전기공학과 졸업
성균관대학교 경영전문 대학원 졸업
SK mySUNI 반도체 Biz 인사이트 칼럼 연재
B2B 마케팅 기초 이론 강사